인사말·추천사



인사말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역사의 수많은 시련기에도 고유한 문화와 정서를 가꾸어왔던 것처럼, 오늘을 사는 우리는 그와 같은 전통적인 문화의지의 집약능력을 발휘하여 균형 잡힌 인간 사회를 이룩해 내는 데 부끄러움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다행히 20여 년 전부터 준비해 온 출판박물관을 개관하게 된 것도 바로 여기에 뜻이 있는 것입니다.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설립되는 이 출판박물관의 개관에 이르기까지 결코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 생애를 바쳐 정진한 출판인의 마지막 사명이라는 간절한 발원이 오늘을 있게 한 것이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南明泉和尙頌證道歌> 등 여러 점의 국보급 전적을 비롯, 희귀 양장본에 이르기까지 40여만 점 이상의 전적과 관계 자료를 소장 전시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출판 인쇄문화 1천 3백 년의 역사를 일람하게 된 것입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관계 자료의 정리와 보관, 전시를 위해 우리들은 혼신의 힘을 쏟을 것입니다.나아가 우리는 이 출판박물관이 개인의 것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 사용한 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느끼게 할 민족 공유의 문화기관으로 발전시킬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 자신의 기업문화 창조와 계승은 물론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될 출판문화 창달에 주어진 한몫의 역할을 다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모쪼록 관계 여러분께서는 뜨거운 협조와 관심으로 이끌어주시기 바랍니다.

관장 김종규

추천사

출판박물관은 책의 탑입니다. 세계 최고의 인쇄물인 무구정광 대다라니경을 우리가 오늘 다시 볼 수 있는 것은 불국사의 석가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300여 년 동안의 비와 바람 그리고 수많은 역사의 간과를 이겨낸 그 탑신처럼 이 출판박물관은 성스럽고 튼튼한 돌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슬기와 정성을 담은 온갖 진귀한 책들이 이제는 어떤 것도 범접하지 못하는 성역의 금줄을 두르게 될 것입니다. 망각의 시간도, 시샘 많은 폭풍도 이곳에서는 그 움직임을 멈출 것입니다.
탑 속의 다라니경이 단순히 읽혀지기 위해서 있는 경이 아니었던 것처럼 출판박물관 속에 들어온 이 책들은 서재나 도서관의 책과는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여기의 이 책들은 단지 존재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빛을 냅니다. 읽는 책으로부터 존재하는 책으로 바뀌어졌기 때문입니다. 종이는 문화의 화석이 되고 생활은 역사가 됩니다. 이미 이것들은 서점에서 매매되는 출판물이 아닙니다. 천년 뒤에 해독될 상형문자의 신비한 몸짓들을 위해서, 그리고 오랜 침묵 뒤에야 비로소 발음되는 표음문자들의 나직한 발성을 위해서 쌓아올린 화강암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박물관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이 박물관의 문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천년 뒤의 먼 미래입니다 . 이 박물관이 아니었던들 우리는 어떻게 연약한 종이와 퇴색하기 쉬운 역사의 문자들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출판박물관은 책의 씨앗입니다. 씨앗은 꽃이 시들어 떨어진 자리, 색채와 성장이 멈춘 그 끝 자리에서만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그 씨앗들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현란한 색채도 향내도 아니고 모래알처럼 굳어버린 비생명적인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이 씨앗이 부드러운 흙에 떨어지고 비를 만나면 다시 꽃이 되고 향기를 풍깁니다.
씨앗은 꽃의 죽음이며 동시에 꽃의 출생입니다.
그것처럼 여기의 이 책들은 우리가 책믿때서 만날 수 있는 신간 도서가 아닙니다. 빳빳한 풀기가 있는 종이의 촉감도 , 싱그러운 먹의 향기도 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곰팡내 나는 박물관의 이 무수한 책들이 있기 때문에, 그 책들의 죽음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앞으로 태어날 새로운 책들을 예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끝과 시작이 하나인 그 씨앗의 신비처럼 출판박물관은 모든 책의 묻이며 동시에 하나의 시작인 것입니다 .
출판박물관은 우리의 악기입니다. 책은 옥퉁소가 됩니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가까이 가서 입술을 대고 허파 깊숙이 호흡을 하면 아름다운 음향이 들려옵니다. 잠자는 영흔들을 깨우며 파도처럼 일어서는 만파식적, 그 옛날 기적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던 만파식적의 그 피리소리가 들려옵니다. 박물관의 이 침묵, 천년의 침묵, 그러고 먼지들은 우리의 뜨거운 입김을 기다립니다. 평범한 글자들을 맑은 피리소리로 바꾸는 책의 목관악기 – 이것이 지금 우리가 문을 연 출판박물관의 의미입니다.
역사의 첫장이 넘겨집니다. 최초의 이 박물관은 탑처럼, 씨앗처럼, 그리고 목관악기처럼 책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출판박물관의 주춧돌 위에 새겨진 김봉규, 종규 형제분의 이름은 활자의 자모처럼 앞으로 많은 의미들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초대 문화부장관 이어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