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건네다 / 저자 서명본 전 1


인사말

책을 사랑하는 모든 분에게 인사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삼성출판박물관 관장 김종규입니다.
매서운 겨울 추위를 뒤로 하고 새 봄의 희망을 노래했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만, 이제 계절은 하지(夏至)를 지나 염천(炎天)의 여름입니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의 무상함 가운데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책의 가치, 책의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저희 삼성출판박물관은 그러한 가치와 의미를 발양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늘 관심과 성원을 보내주시는 이 땅의 책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이번에 저희가 준비한 책의 성찬(盛饌)은 저자의 숨결과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책, 저자 친필 서명본입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책 한 권을 건네는 손길과 마음만큼 소중하고 귀한 것이 또 있을까요. 더구나 책을 건네는 그 한 사람이 바로 책을 쓴 저자라면 그 소중함의 깊이는 한층 더하리라 생각합니다. 책에 적힌 길지 않은 저자 서명과 인사말에서 우리는 책의 저자이기에 앞서 한 사람의 인간과 만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책들 대부분은, 오늘날 우리 모두와 시대의 호흡을 함께 해온 다양한 분야의 저자들이 서명한 책들입니다. 연기를 통해 대중과 시대의 애환을 함께 해온 배우 최불암, 치열한 작가혼을 불태워 온 시인 고은, 20세기 한국의 대표 지성 이어령, 늘 시대적 의미가 심장한 지적(知的) 화두를 던져온 도올 김용옥, 성(聖)과 속(俗)의 경계에서조차 자유로웠던 자유인 중광 스님, 그밖에 다양한 작가, 학자, 예술인들의 서명본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지난 세월 교유(交遊)해 온 우리 사회의 수많은 인사들과의 인연의 매듭과 결을 이번 전시를 통해 새삼 돌이켜 확인하게 된다는 점에서, 감개가 무량하기 그지없습니다. 모쪼록 저희가 마련한 책의 성찬에 참석하셔서 의미 있는 시간을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저희 삼성출판박물관에 관심과 격려를 보내주시기를 부탁드리면서, 늘 건승하십시오! 감사합니다.

2009년 8월
삼성출판박물관 관장 김종규

전시개요

사인본의 일반적인 그러나 다채로운 풍경

일반적으로는 사인본으로 일컫는다. 그러나 이름은 다양할 수 있다. 저자 서명본, 저자 헌정본, 친필 서명본, 저자 기증본, 저자 친필 사인 기증본 등등. 그러나 그 뜻은 같다. 책을 쓴 저자가 직접 펜으로 자신의 성명과 간단한 인사말을 책의 어떤 부분에 적어놓은 책이다. 사인본의 동기 또는 성격은 다양하다. 저자가 출판을 기념하는 독자 대상 행사에서 불특정 다수의 독자들에게 행사 현장에서 직접 사인하여 건네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행사 현장에서 독자가 책을 구매하여 그 책에 사인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작가 사인 행사라고나 할까. 인기 작가 또는 유명인의 사인 행사에서는, 사인을 받으려는 독자 또는 팬들이 제법 긴 줄을 이루는 것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많기로는 저자가 평소 친분 있는 지인(知人)에게 건네는 사인본이다. 이 경우에 자주 쓰이는 말이 다름 아닌 ‘혜존’(惠存)이다. 이는 ‘받아 간직하여 주십시오’라는 뜻으로, 자신의 저서나 작품 등을 다른 사람에게 드릴 때 상대편의 이름 아래에 쓰는 말이다. 이와 함께 자주 쓰이는 말이 ‘졸저’(拙著)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솜씨가 서투르고 보잘것없는 저술’이 되겠는데, 물론 자신의 저술을 겸손하게 이르는 표현이다. 이러한 ‘혜존’과 ‘졸저’에는 각각 그에 해당하는 영어 표현도 있다. ‘혜존’은 ‘with the compliments (of the author)’ 또는 ‘To (Presented to) Mr….with best wishes from…’ 그리고 ‘졸저’는 ‘my humble work’ 또는 ‘my unworthy work’로 표현된다.
한편 저자의 성명 바로 다음에는 일반적으로는 ‘올림’, ‘올립니다.’ 또는 ‘드림’, ‘드립니다’ 같은 표현이 쓰이지만 ‘著者 識’ 또는 ‘著者 누구누구 識’ 같은 표현이 쓰일 때도 있다. 여기에서 ‘識’은 책의 저자 서문 말미에서도 자주 쓰이는 말인데, 이 한자를 ‘식’으로 발음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물론 ‘識’은 분간하다, 알다, 분별하다는 뜻으로 쓰일 때 ‘식’으로 발음한다. 인식(認識), 식별(識別)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표지(標識)라는 한자어에서 알 수 있듯이, 기록하거나 표시한다는 뜻으로 쓰일 때는 ‘지’로 읽어야 한다. 요컨대 ‘저자 식’이 아니라 ‘저자 지’가 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主人 白’을 ‘주인 백’으로 읽는 오류가 있다. 말하다, 알리다 등을 뜻할 때는 ‘白’을 역시 ‘지’로 읽어야 한다.)
사인본에는 반드시 저자의 성명과 인사말만 적히는 것은 아니어서, 저자의 인장(印章)이 찍히거나 간단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경우도 없지 않다. 예컨대 이번 전시회에서 우리가 보게 될 도올 김용옥의 사인본에는 도올 특유의 개성 넘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화가 박재동의 사인본도 마찬가지다. 이런 경우에는 거의 작품 수준에 가까운 사인본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상투적인 표현만 적혀 있는 경우보다 훨씬 더 인상적이고 뜻 깊은 사인본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적지 않은 사인본에는 서명을 한 날짜 연월일이 적혀 있는 경우도 드물지 않은데, 그런 날짜를 보고 있노라면 순간이나마 세월의 무게와 자취까지 느낄 수 있어서 더욱 각별하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사인본의 다양한 의미

사인본의 의미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꿔 던질 수도 있다. 도대체 왜 친필 서명이라는 행위를 하는가? 또는 그런 행위가 지니는 의미는 무엇인가?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책을 받을 사람을 향한 저자의 진실한 마음 그 자체다. 그 마음이란 평소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고 격려해주며 관심을 기울여 준 이를 향한 고마움이다. 그 마음이란, 선뜻 건네기 부끄러운 보잘것없는 저서이나마 이렇게 나왔다는 것을 겸손하게 알려드리고 인사 올리는 마음이다. 그 마음이란, 소중하게 건네는 이 책을 소중하게 읽어주시기를 바라는 간곡한 마음이다. 요컨대 저자의 친필 서명은 저자의 마음의 흔적 그 자체다.
둘째로 책에 적힌 저자의 친필 서명은 책에 대한 저자의 자부심과 책임의식이다. 그것은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온전하게 저자 자신이 책임진다는 일종의 보증 행위이기도 하다. 자신의 책에 대해 자신이 책임지지 못한다면 그 누가 책임질 수 있겠는가? 그런 책임의식은 곧 자부심이기도 하다. 자기 책에 대한 자부심이 없다면 어떻게 친필로 사인을 하여 건넬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자부심이란 자만과는 거리가 먼 것이어서, 가장 겸손한 형태의 자부심이다. ‘한 번 읽어보시고 기탄없는 질정(叱正)을 부탁드린다’는 뜻이 들어 있는, 지극히 겸손한 자부심이다.
셋째로 (특히 저자 사인 행사의 경우) 독자와 저자의 아름다운 소통 행위다. 나의 책을 읽어주는 독자, 저자로서의 나를 알아주는 독자가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는가. 책을 쓴 저자만이 누릴 수 있는 그러한 행복에 감사하면서 독자에게 정중히 답례하는 행위가 바로 서명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책은 저자가 그것을 써서 펴냈다고 완성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써서 펴내는 것을 일종의 발신(發信)이라 한다면, 그것을 독자가 읽을 때, 그러니까 수신(受信)할 때 비로소 책은 완성된다. 요컨대 책은 저자와 독자가 함께 완성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사인 행위는 발신자로서 수신자에게 답례의 말을 건네는 아름다운 행위, ‘부디 이 책을 저와 함께 완성해나가 주십시오’라 부탁하는 소통 행위다.
넷째, 저자의 사인 행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사회적 행위다. 펜으로 자기 성명과 인사말을 적어 특정 지인(知人)에게 건넨다는 행위 그 자체로만 보면, 지극히 개인적 행위로 보인다. 그러나 그 행위는 저자가 쌓아 온 사회적 관계망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이기도 하다. 만일 어느 한 저자가 어떤 사람들에게 사인본을 건넸는지 알 수 있다면, 그것을 통해 그 저자의 사회적 관계망이 그대로 드러난다. 사인본 기증 행위를 지적(知的) 노동의 구체적 결과물을 증여(贈與)하는 행위로 본다면, 여기에는 일종의 ‘증여의 사회학’이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섯째, 마지막으로 저자의 사인 행위는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다. 무슨 말인고 하니, 저자가 책에 남긴 한두 줄의 메시지와 그것을 남긴 날짜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저자에 관한 연구에서 하나의 중요한 사료가 될 수 있다. 국내외 작가 기념관 같은 곳을 방문해보면, 작가 친필 사인본이 매우 중요한 유물이자 전시물로 대접받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요컨대 그것은 중요한 역사적, 문화사적 가치를 지닌다.

수집의 대상으로서의 사인본

저자의 친필이 적힌 사인본은 도서 수집가들의 수집 대상이 되곤 한다. 저자의 친필 사인본 대부분은 책의 초판(初版)이다. 물론 재판(再版) 이후의 책에 서명하여 기증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겠으나, 아무래도 책이 처음 선보였을 때 서명을 하여 기증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요컨대 ‘초판 저자 사인본’이기 때문에 그 가치가 빛나는 셈이다. 오늘날 세계 최대의 베스트셀러로 각광받는 조앤 K. 롤링의 ‘해리 포터’의 경우를 보자. ‘해리 포터’ 시리즈의 1편 ‘해리 포터의 현자의 돌’ 초판 양장본(1997년)이 영국 런던의 크리스티 경매소에서 4만326달러에 낙찰된 적이 있다. 2007년 10월의 일이다. 그 책은 블룸스베리 PLC에서 출판한 500부 한정판 가운데 하나로, 표지 뒷면에 저자 조앤 K. 롤링의 친필 사인이 적혀 있다.
저자의 친필 사인이 없는 초판본이었다면 과연 경매소에서 거래될 수 있었을까? 현대 환타지 소설 장르의 원전이자 원형으로 평가받는 J. R. R 톨킨의 작품 초판본도 수집품으로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 그가 자신의 제자에게 메시지를 담아 적어 건넨 ‘반지의 제왕’ 초판본이 경매에서 10만4천 달러에 낙찰된 적이 있다. 톨킨은 책 안에 ‘나의 가장 오랜 친구 퀸 오브 호빗 엘린에게 바침’이라고 적어놓았는데, 여기에서 ‘퀸 오브 호빗 엘린’이란 톨킨 자신의 집필 활동에 큰 영향을 준 제자 엘린 그리피스를 뜻한다.
적극적인 수집가들 가운데는 작가에게 사인을 부탁하기 위해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직접 방문하거나, 작가에게 책을 우편으로 보내 사인을 부탁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후자의 경우에는 반송용 우표를 동봉하여 작가에게 보낸다. 이에 관해 미국 작가 제임스 A. 미치너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자동차로 수백 킬로미터를 달려와 책에 서명해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루에도 대여섯 권씩 서명을 부탁하는 책들이 배달되어 제 책상에 쌓이곤 합니다. 작가로서 이름이 좀 얼려진 다음부터는 늘 그래왔지요. 제가 세상을 떠나고 20년 정도 지나면, 오히려 제 친필 서명이 없는 책을 구하는 게 더 쉬울지도 모르겠네요.”
이러한 친필 사인본 수요에 미리 대처하는 작가도 드물게나마 있다. 소설가 존 업다이크는 자신의 작품들 가운데 일부를 골라 종 당 수백 권씩만 인쇄해서 직접 서명한 특별 한정판 사인본을 펴낸 것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초판 사인본 수집 문화는 그러나 유럽과 영미권, 그리고 일본에서 활성화되어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다. 시쳇말로 ‘시장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못한 셈이다. 물론 시장 형성 가능 수준의 수요까지는 아니어도,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인기 작가들에 국한되어 있기는 하지만 친필 사인본이 활성화될 조짐이 보이고 있다.
예컨대 작가 김훈의 ‘칼의 노래'(생각의 나무) 판매 100만 부 돌파를 기념하여, 출판사가 작가 친필 사인이 들어간 특별소장본 2000부를 한정판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작가 조정래도 ‘태백산맥’ 200쇄 돌파를 기념하여, 친필 사인과 한정판 표시가 되어 있는 2,000세트 특별한정판을 내기도 했다. 아직까지는 도서 수집가들이 자발적으로 형성한 하나의 문화가 아니라, 출판사가 주도하는 기념행사 차원의 친필 사인본 문화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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