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판화 특별전 2

축사·인사말

세계최고의 판화 전통이 다시한번 이 땅에 나투기를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 티벳, 몽골, 일본 등 동북아국가들은 빛나는 목판화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은 지금도 민간판화인 년화의 발전을 바탕으로 노신선생이 주도한 신목판운동을 전개하여 민중계몽운동에 목판화를 활용함으로써 현재까지도 빛나는 목판화의 전통을 유지 발전해오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중국 다색판화 기법을 받아들여 우끼유에라는 독특한 채색판화를 발전시켜 서구 인상파화가들에 까지 그 영향을 미치며 세계판화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의 불국사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세계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을 만든 나라이지만, 안타깝게도 그 찬란한 전통을 계승해 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을 직시하고, 잊혀지고 사라져가는 고판화를 한점, 한점 찾아 고판화의 맥을 잇고자 노력하는 선각자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선각자들의 노력으로 잊혀지고 없어져 버릴 우리의 전통이 이 땅에 다시 꽃필 수 있는 작은 희망의 씨앗이 심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선각자 중에 한분이 바로 삼성출판박물관 김종규 회장이십니다. 작년에는 그 동안 땀흘려 수집하신 고판화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판화로 찍혀진 서책을 중심으로 전시회를 열어 고판화를 사랑하는 많은 애호가들의 호평을 얻었습니다. 이어서 2005년 고판화특별전에서는 우리나라 민간판화를 대표하는 능화판화, 시전지판화, 부적판화를 중심으로 전시회를 개최한다하니 고판화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세계최고의 목판를 다시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의 씨앗을 심는 계기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이러한 뜻 깊은 전시회를 만들어 주신 김종규 회장님을 비롯한 많은 삼성출판박물관 관계자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2005년 11월
치악산명주사 고판화박물관장 한선학 합장


古 인쇄 문화의 새로운 조명『고판화 특별전』

우리나라의 고 인쇄와 관련된 역사와 유물은 참으로 위대하고 경이롭습니다.
세계최고(最古)인 목판 권자본(卷子本)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751년경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과, 고려 고종조에 제작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그리고 14세기 후반에 제작되어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원명: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가 그 경이로움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 인쇄와 관련된 전통문화의 이해나 관심은 상대적으로 낮은 형편이여서, 그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민족문화의 큰 축인 고 인쇄의 유구(悠久)한 결정체를 통해 국민들의 문화 향수권 고양을 목적으로 설립한 삼성출판박물관은 금년으로 개관15주년을 맞이했습니다.
국보 265호인‘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初雕本大方廣佛華嚴經) 주본13권’, 최초의 금속활자 복각본인 보물 제758호‘남명천화상송증도가’등 국가지정문화재 10여점을 비롯해 모두 40만 여점의 소장유물은 이러한 노력의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이번에 갖게 되는 고 판화특별전에서 인쇄·출판의 모태가 되었던 우리 고 판화 중 목판을 시전지판(詩箋紙板), 능화판(菱花板), 부적목판(符籍木板), 명당도 목판(明堂圖木板), 조선팔도 지도목판(朝鮮八道 地圖木板) 등 5개 분류하여 목판과 판화 50여점을 선보이게 됩니다.
화전지판(花箋紙板) 또는 화전지 목판(木板)이라고도 불리는 시전지판은 좋아하는 시구절(詩句節)이나 애장품의 미적 형상, 당호(堂號), 성명 등을 목판에 새겨 종이에 찍어내는 도구입니다. 또한 능화판이란 일반적으로 책 겉장에 무늬를 박아내기 위한 목판인데, 만자(卍字), 완자(完字), 구갑(龜甲), 마름모꼴 의 사방 연속무늬라는 뜻의 능자(菱字)무늬에서 유래하고 있습니다.
액막이(厄防止), 소원성취, 전통 불교로 구분되어 전시하게 될 부적목판은 벽사(?邪)와 소원성취의 목적으로 많이 사용했던 것입니다. 또한 명당도 목판은 풍수도참사상을 바탕으로 명당(明堂)을 나타내고 있는데, 묘지 주변의 조경이나 큰 길, 시냇물, 바위, 전답 등을 비교적 상세하게 표현하고 있어 지도목판과 연결되는 재미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렇듯 목판은 용도와 종류는 다양하고 재미있으며, 우리민족의 사상과 생활풍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귀중한 유물인 것입니다.
이번 특별전에 바쁘시더라도 꼭 방문하셔서 우리민족문화 정체성의 결정체인 목판화의 세계를 몸소 체험해보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이번 전시가 성공적으로 개최될 수 있도록 지원해주신 서울시와 종로구청 여러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2005년 11월
삼성출판박물관 관장 김종규

전시개요

시전지판(詩箋紙板)

아침에 까치가 울면 소식이 오거나 손님이 올 것이라고 믿었던 순박한 선비나 한량들은 멀리 있는 친척이나 벗에게 정담을 글로 적어 보냈다. 오늘날과 같이 고도로 발달된 통신수단을 갖지 못하였던 예전, 우리 선조들은 인편을 이용하여 직접 구두(口頭)로 혹은 두루마기 종이에 내용을 적어 보내는 일이 고작이었다. 아무리 바빠도 서두르지 아니하고 여유를 가졌던 선인(先人)들은 어느 것 하나에도 가벼이 여기지 아니하였다. 조그마한 소식을 전하는 종이일지라도 보내는 이의 마음과 기원이 담긴 아름다운 문양으로 장식하거나 자연 염료로 물들인 채색지를 사용하였다.
시전지의 전통은 중국으로부터 유래되었다. 그것은 종이의 제작이 중국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으며 처음에는 그냥 전지(箋紙)라고 불렀다. 원나라때 비저(費著)라는 분이 쓴 전지보(箋紙譜)를 보면 종이는 촉지방의 특산물이고 전지 또한 촉지방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시전지판은 평소 좋아하는 싯구절(詩句節)이나 평소 좋아하는 애장품의 아름다운 형상이나 당호(堂號), 이름 등을 목판에 조각하여 편지지와 같은 종이에 찍어내는 도구로, 화전지판(花箋紙板) 또는 화전지 목판(木板)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목판의 문양이 찍힌 종이를 시전지(詩箋紙), 화전지(花箋紙), 간찰지(簡札紙), 서찰지(書札紙) 또는 운문지(雲紋紙) 등으로 구분한다. 이는 편지의 내용이나 보내는 사람에 따라 나누어 사용한다.
시전지판의 크기는 작은 것은 7㎝×15㎝에서 큰 것은 30×40㎝ 정도로 다양하다. 문양의 종류는 사군자(四君子), 화조(花鳥), 괴석(怪石), 서가(書架), 문방사우, 동물, 식물, 정자 등 매우 다양한 취향에 따른 내용이 조각된다. 또한 자신이 좋아하는 싯구(詩句)나 좌우명(座右銘)을 새기기도 한다. 나무는 비교적 단단한 박달나무나 대추나무, 참죽나무, 향나무 등의 고급 목재가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피나무나 바가지 재료 등의 조각이 쉽고 간편한 재료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조각은 신분 등급에 따라 차이가 있어 보이는데 사대부 계층의 부유층은 매우 세련된 솜씨로 뛰어난 조각품이 남아 있기도 하지만 서민층이나 한량들이 사용했던 조각품은 마치 조선후기 민화와 같은 거칠고 서툰 듯하지만 단아한 맛과 정감이 가는 조각품들도 남아 있다.
아름다운 시전지판을 이용하여 문양을 찍어낼 편지종이도 계절이나 글의 내용에 따라 색깔과 크기를 달리하였다. 편지를 다 써서 봉투(封套)에 넣고 봉함인(封緘印)을 찍는다. 이 때 사용되는 봉함인도 주인의 성격에 따라 다르며 크고 작은 도장에 전자체(篆字體)나 추상적인 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러니까 편지 한 장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이 되어 보내는 이의 마음과 정성이 듬뿍 담기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간찰(簡札)들은 선조들의 손에서 사랑을 받아온 정신적인 애완물이었고, 한편으로는 풍류와 멋을 담은 지혜의 소산인 것이다. 선비들의 고독한 마음이나 즐거운 표현을 편지의 내용이 아니더라도 장식적인 문양을 통하여 애써 남에게 보여주는 한 방법으로 이용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소식을 주고받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우리 조상들은 남에게 보내는 조그만 편지 한 장에도 저렇게 아름다운 색지에 글을 쓰고 도장을 찍어 도포자락 속에 넣어 소식을 전하던 은근하고 자상한 마음씨를 지녔다.
멀리 떨어져 살았지만 정담 어린 내용의 소식을 받으면 반드시 답을 전하는 예절 속에는 화전지판과 같은 자신의 멋과 정성을 함께 담아 보냈던 선조들의 운치와 재치는 너무나 평화롭고 자연스러운 생활의 일부였다.

능화판(菱花板)

능화판이란 일반적으로 책 겉장에 무늬를 박아내기 위한 목판을 의미한다. 요즘에는 책을 만들 때 기계로 제본하지만 전통적인 방식은 수(手)작업에 의한 선장본(線粧本)으로 책을 실로 묶는다. 이때 겉표지는 튼튼하고 질기고 또 아름답고 권위있게 하기 위하여 치장을 하게 된다. 그 과정을 보면 두툼한 백면지(白綿紙)에 치자 또는 비자, 아주 드물게는 쪽물을 곱게 들여 예쁜 색지를 만든 다음 이것을 능화판 위에다 붙여 놓고 밀랍(蜜蠟)을 칠한 뒤에 밀돌로 힘껏 문지르면 능화판에 새겨져 있는 문양이 요철로 드러나면서 아름다운 도들무늬가 새겨지게 된다. 그래서 능화판은 간혹 책판(冊板)이라고도 불리며 사실상 책판이라고 했을 때 그 의미가 더 확연해진다.
책의 포장에 사용되는 책판을 언제부터 왜 능화판이라고 불렀는지에 대하여는 아직 확실하게 규명한 정설이 없다. 다만 책판의 문양 중에 마름모꼴의 능화(菱花)형태가 더러 있어서 거기에서 연유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것을 먼저 어원적으로 따져보면 『사원(辭源)』(商務印書館刊)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풀이되어 있다. 능(菱)은 본래 능(凌)이다. 열매를 맺는 식물이며 연못의 방죽에서 자란다. 능 또는 마름(菱)이란 식물은 연못이나 논에서 자라고 있는 한해살이 풀로서 진흙 속에 뿌리를 박고 물 속에서 가느다란 줄기가 자라서 물 위에 나오면 마름모 모양의 삼각형 잎이 뭉쳐서 돋아난다. 그 열매를 마름(菱實)이라 한다.
조선시대 책판문양의 대종이 연화문과 만자문으로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능화판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배경에는 불교, 유교, 민속 신앙들이 시대의 흐름 속에 복합적으로 습합되는 과정 그리고 문양의 생성과 소멸과정을 보여주는 양식사적 흐름 속에서 설명될 수 밖에 없다.
현재 능화판이 사용된 가장 빠른 시기의 책은 고려말(1354년)의 『졸고천백』이지만, 이겸노가 지적하였듯이 이미 상당한 수준의 능화판이고 보면, 고려 초기나 중기로 능화판의 시원을 올려도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된다. 우리나라 인쇄 기술을 보면 통일신라 경덕왕(742-765) 때 목판인쇄가 보급되어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같은 목판이 간행되었고, 고려시대에도 계속되어진 대장경간행으로 목판인쇄술은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하였다. 능화판의 조각방식은 다른 목판(목활자판, 부적판, 시전지판, 떡살 등)의 제작방식과 유사하다. 능화판 판목으로 가장 좋은 재질은 뼈대나 옹이가 없이 칼질에 잘 깎여 나와야 되므로 배나무나 거제도·울릉도(鬱陵島)에서 나는 거제수, 감나무, 피나무, 행자나무판 같은 것이 좋다. 이들 나무는 물이 한창 오르는 봄을 피해서 가을이나 겨울철에 벌목한 후 바다나 웅덩이 같은 데에 몇 년간을 침장해서 결을 삭힌 다음 벌레 먹는 것을 막고 결을 한층 더 삭히기 위해서 소금물에 삶아 내어 진을 뺀 다음 다시 몇 년을 비바람에 바래게 한 다음에야 능화판재로 쓸 수 있다.
조선시대 책판문양으로서 능화판은 아주 다양한 내용을 갖추고 있다. 이를 유형별로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이 몇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우선 기하학적인 사방연속무늬로 만자(卍字), 완자(完字), 구갑(龜甲), 마름모꼴 사방 연속 무늬라는 뜻의 능자(菱字)무늬, 그리고 의미를 지니지 않는 순수 기하학적 연속무늬 등이 있다. 이러한 기하학적 연속무늬들은 그 자체로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하나의 종속문양 또는 바닥무늬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한편, 능화판 중에서 가장 한국적인 문양을 표현한 것으로 귀갑, 뇌문, 서화(瑞花), 자류문, 불수감문(佛手柑紋), 화문, 선도문(仙桃文), 팔괘문(八卦紋), 호접문(胡蝶紋), 태극문(太極紋), 서운문(瑞雲紋), 연화문, 수복강녕문(壽福康寧紋) 등의 길상문양을 배치한 것으로 대범한 듯 하면서도 각기 물상의 특징을 잘 표현했고 순정적이면서도 문기를 풍기는 포치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능화판 중 아름다운 작품이 많았고 또 가장 한국인의 정서에 잘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각각의 문양들을 상호 중복되지 않도록 어금매겨서 배열한 솜씨는 놀라울만하다.
또한, 문자무늬에는 수(壽), 복(福), 강(康), 녕(寧), 부(富), 귀(貴), 약(藥), 다남(多男) 등이 있다. 이 문자무늬들은 대개 사방연속무늬를 바닥 무늬로 하고 그 위에 크게할 경우는 하나 둘, 작게 할 경우는 여덟 글자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밖에도 나무, 열매 등 식물문양 등이 있다. 여기에는 주로 연꽃, 국화꽃, 모란꽃, 매화꽃 등이 독립된 꽃으로 또는 당초무늬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복숭아, 석류와 댓잎도 동일한 맥락에서 문양으로 발전하였다. 식물문양 가운데 흔히 쓰이고 있는 연당초문판을 보면 연꽃, 연밥, 연잎을 한 줄기의 덩굴로 연결한 일종의 연당초문(蓮唐草紋)으로서 이러한 문양의 연원은 고려시대 이래로 지속적으로 내려온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에는 연당초문과 보상당초문이 각종 장식의장에 많이 쓰여 왔고, 더구나 불교공예품에는 매우 세련된 연당초문이 애용되었으며, 조선시대에도 그러한 호상이 전래되어 책 표지에 상용되었을 것이 아닌가 한다.
마지막으로 곤충, 동물 문양이 있는데 여기에는 주로 나비, 박쥐, 용, 학 등이 나타난다. 나비는 간혹 국화꽃과 함께 등장하고 용과 학은 구름무늬와 함께 엮어지곤 한다. 박쥐의 한자 편복의 복은 그 음(音)이 복(福)자와 같아서?복쥐?라는 상징성을 지닌 것이며, 쌍룡문(雙龍紋), 운룡문(雲龍紋) 등의 책판은 궁중에서 펴낸 책 또는 궁중소장의 서화첩(書畵帖) 포장으로 사용되었다.

동해척주비(東海陟州碑)

동해 바다 연해에 있는 강원도 삼척과 이웃한 동해시에는 주민들이 매우 신성시하며 보물로 여기는 한 동해척주비라는 한 비석이 있다.
삼척부사로 부임한 허미수(許穆, 1595~1682)는 향약(鄕約)을 만드는 등 백성을 교화하며 여러 치적을 쌓아 목민관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하였다. 그리고 2년간의 짧은 부임 기간 중에 역사에 길이 남을 치적 가운데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척주동해비를 건립한다. 당시 삼척에는 격심한 해파와 조수가 읍내에까지 밀려들어 강의 입구가 막히고 오십천이 범람하여 백성들은 인명과 재산을 잃어버리는 큰 재앙에 시달리고 있었다. 지방의 수령으로 백성의 고통을 안타깝게 여긴 허미수는 그가 평생 연구하고 깨달은 철학의 극치를 담은 오묘한 문장이 동해송(東海頌)을 짓고는 그가 개발한 독특한 전서체(전서체)에 담아 비를 세우게 된다. 이것이 바로 동해척주비(東海陟州碑)다. 허미수가 척주동해비를 세운 이후 신기하게도 아무리 심한 폭푸우에도 바닷물이 넘치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은 그 비석과 비문의 신비한 위력에 놀라 이 비를 퇴조비로 부르기도 했다.

큰 바다 끝없이 넓어 온갖 냇물 모여드니 그 큼이 무궁하여라
동북쪽 사해여서 밀물 썰물 없으므로 대택이라 이름했네
바닷물이 하늘에 닿아 출렁댐이 넓고도 아득하니 바다 동쪽에 구름이 끼었네
밝고 밝은 양곡으로 태양의 문이라서 희백이 공손이 해를 맞이하네
석목의 위차요, 빈우의 궁으로 해가 본시 돋는 동쪽의 끝이네
교인의 보배와 바다에 잠긴 온갖 산물은 많기도 많아라.
기이한 만물이 변화하여 너울거리는 상서로움이 덕을 일으켜 보여주네
조개 속에 든 진주는 달과 더불어 성하고 쇠하며 기운을 토하고 김을 올리네
머리 아홉인 괴물 천오와 외발 달린 짐승 기는 태풍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네
아침에 돋는 햇살 찬란하고 눈부시니 자주빛 붉은 빛이 가득 넘치네
보름날 둥실 뜬 달 하늘의 수경이 되니 뭇별이 광채를 감추네
부상과 사화, 흑치와 마라, 상투 튼 보가족
연만의 굴과 조개, 조와의 원숭이 불제의 소들
바다 밖 잡종으로 무리도 다르고 풍속도 다른데 한곳에서 자라네
옛 성왕의 덕화가 멀리 미치어 온갖 오랑캐들이 중역으로 왔으나 멀다고 복종하지 않은 곳이 없었네
아아, 크고도 빛나도다, 그 다스림 넓고 크나니 그 치적은 영원히 빛나리!

부적목판(符籍木板)

부적은 종이에 글씨나 기타 주술적 기호 등을 그리거나 목판으로 찍은 것으로 그 목적은 복(福)을 불러들이고 액운(厄運)을 물리치는 데에 있다. 부적은 인류가 생겨나고 원시종교가 발생했을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선사시대에는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주로 짐승의 뼈나 돌, 조개, 머리카락, 나무뿌리, 보석 등 자연물을 그대로 이용하다 시대가 내려오면서 점차 조형성을 가미하고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다.
부적은 사용목적과 기능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사(邪), 귀(鬼), 액(厄)을 물리치거나 방어하는 벽사용(?邪用)과 주력(呪力)의 힘을 빌어 좋은 것을 더욱 증가시키는 소원성취(所願成就) 부적이 있는데 그 종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액막이 부적(厄防止符籍)

벽사부적이라고도 부르는 액막이 부적은 부적 가운데 종류가 가장 많고 쓰이는 용도 또한 생활 전반에 걸쳐 쓰이고 있다. 이는 민간신앙 가운데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서운 질병이나 재화를 막기 위해 만들어낸 부적이다. 각종 질병 예방 퇴치부, 재앙퇴치부, 삼재예방부, 귀신불침부, 야수 불침부, 악몽 퇴치부 등이 있고, 이 밖에도 도적 막는 부적, 농축산물 보호부적, 전쟁을 피하는 부적 등 매우 다양하다. 한편, 액막이의 하나로 삼재부적이 있다. 삼재란 사람이 살면서 겪게 되는 세 가지 재난으로 도병재(刀兵災), 질역재(疾疫災), 기근재(饑饉災) 또는 수재(水災), 화재(火災), 풍재(風災)를 말한다. 부적 가운데 가장 예술적인 작품으로 알려진 삼두일족(三頭一足)의 삼재부적 목판은 매우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져 사용되고 있는데 매의 머리가 셋이고 몸둥이와 발이 하나로 되어 있다. 매의 사나운 주둥이와 날카로운 발톱이 유난히 강조되었고 큰 날개와 힘있는 꼬리가 위협적인 무서움을 주는데 이러한 모습이 사람에게 찾아오는 악귀를 막아준다고 믿었다.

소원성취 부적(所願成就符籍)

소원성취 부적의 내용을 살펴보면 남성은 학문을 이루어 과거급제 하는데 중점을 두었고 여성은 부부가 화합하여 가정의 평화를 이루고 아들을 낳아 잘 기르기를 바라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 다음이 물질적 풍요와 사후 세계를 걱정하는 내용으로 일상적 삶에서 추구되는 본질적인 것들이다. 한편, 수명장수와 사후세계의 평안을 바라는 소원성취 부적류는 인간에게 교훈적, 계몽적, 암시적 기능을 부여하는 주력(呪力)을 지니고 있다.

전통 불교 부적(傳統佛敎符籍)

이상의 부적 외에도 불가에서는 중생들에게 사바세계의 액운을 막아주고 한 삶을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해 각종 부적을 신도들에게 나누어 가정의 행복과 풍요를 기원하는 것이 있다. 이는 부처의 지혜로 정신이 통일되고 성불의 목적이 있는 다라니부적을 비롯, 불교와 직접 관련이 깊은 구도부(求道符), 멸죄성불부(滅罪成佛符), 당득견불부(當得見佛符), 위인염불부(爲人念佛符), 왕생정토부(往生淨土符) 등이 있다. 원래 불교적인 소재만 있었던 부적 속에 점차 길상적인 의미와 벽사적 내용이 조금씩 첨가되어지다가 근래에는 종합적인 다목적 부적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다.

부적목판(符籍木板)

집안에 복숭아나무를 심으면 귀신이 침범하지 못한다 생각했는데 이 가운데 동남향으로 곧게 뻗은 복숭아 나뭇가지, 도동지(桃東枝)는 양기(陽氣)를 가장 많이 받기 때문에 음(陰)에 해당되는 귀신이 제일 무서워하는 나무로 여겨졌다. 또한 벼락맞은 대추나무(霹棗木) 역시 매우 희귀한 목재로 몸에 지니고만 있어도 잡귀가 침범하지 못한다고 하며, 닭장 속에 넣어두면 닭이 울지 못할 만큼 기(氣)가 충전된 신비한 힘이 있다고 한다. 때문에 부적 목판에 쓰이는 나무로는 복숭아나무, 대추나무가 주로 쓰였고 이밖에도 박달나무, 엄나무 등 다양한 소재의 부적 목판이 만들어졌다.
부적 목판 새김질은 원하는 초본을 반드시 한지에 그려 다듬어진 나무에 정반대의 방향으로 붙인 다음 들기름칠을 하면 뒤집어진 형상의 문양이 나타난다. 새김질을 시작하는 자세는 부적을 쓸 때와 같이 경건한 마음으로 진행되는데 쓰이는 기법은 양각이나 음각적으로 이루어진다. 새김질의 방법은 서각을 할 때나 판화를 할 때 사용하는 기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칼의 종류는 끌, 창칼, 평칼, 삼각칼, 둥근칼 등이 기본으로 적용된다. 완성된 부적목판은 부정을 방지하도록 수비된 황토물이나 경명주사에 담근 후 효험이 있기를 기원하는 간단한 예를 갖추고 사용된다.

명당도 목판(明堂圖木板)

묘도, 묘소도, 명당도 등으로 부르는 목판은 족보를 만들 때 족보판과 함께 만들어지고 사용되었다. 족보의 맨 앞장을 장식하거나 문중, 또는 같은 성씨에서 딴 갈래를 이루어 나온 파계(派系) 계통을 정리할 때에 쓰이기도 한다.
명당(明堂)이란 풍수지리설에서 이상적 환경으로서의 길지(吉地)를 뜻하는 개념적인 용어를 뜻하고 있다. 살아서는 좋은 환경을 갖춘 집자리에서 살기를 원하고, 죽어서는 땅의 기운을 얻어 영원히 살기를 원했던 사람들의 땅에 대한 사고가 논리화된 것이 풍수지리설이다. 그 원리에 따라 실제의 땅을 해석하는 방법으로 간룡법(看龍法)·장풍법(藏風法)·득수법(得水法)·정혈법(定穴法)·좌향론(坐向論)·형국론(形局論) 등이 있다. 이 가운데 특히 명당을 상세히 논하고 있는 경우는 정혈법으로, 풍수에서 요체가 되는 장소인 혈(穴)은 음택(陰宅 : 묘소)의 경우 시신(屍身)이 직접 땅에 접하여 그 생기를 얻을 수 있는 곳이며, 양기(陽基 : 집)의 경우 거주자가 실제로 삶의 대부분을 얹혀 살게 되는 곳인데 명당은 이 혈 앞의 넓고 평탄한 땅을 일컫는다.
묘판(墓板), 주거지의 경우 주건물의 앞뜰을 내명당(內明堂)이라 하고, 이보다 더 앞쪽으로 비교적 넓은 땅을 외명당(外明堂)이라 부른다. 이는 또한 중명당(中明堂)·내명당(內明堂)으로 부르기도 한다. 명당은 넓고 평탄하고 원만해야 하며, 좁고 경사지거나 비뚤어지면 좋지 않고, 명당이 제대로 되어야 혈도 진혈(眞穴)이 된다고 한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명당자리를 차지하려는 인간 모두의 갈망으로 인하여 사회적인 문제가 일어난 경우도 많다.
명당도 판속에는 묘지 주변의 조경이나 큰 길, 시냇물, 바위, 전답까지도 표시하는 경우가 있고 표 앞의 정자나 제각, 사당 등의 건축물도 그려지고 있다. 목판의 크기에 따라 개인의 묘소만을 나타내는 작은 것에서부터 시조묘, 또는 문중 전바의 산소 분포도를 그려 놓는 경우도 있다. 재질은 오래동안 다양하게 사용되는 용도에 따라 두껍고 단단한 목재인 박달나무, 잡목, 소나무 등이 있고 비교적 조각이 쉬운 피나무나 행자나무 등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명당도의 형태는 실제지형보다 명당임을 강조, 미화하는 과정에서 산의 형태가 아름다운 꽃이나 추상적인 형국으로 변해버린 경우와 초본을 잘못 그렸거나 잘못 새김질하는 과정 등이 눈에 띄기도 한다. 명당도판 속의 무덤은 실제 작은 점이나 봉분을 판에 비해 적게 표시하며 무덤을 중심으로 대부분 산의 형국을 과장되게 그려 조각하였다.
우리나라의 무덤이 일찍부터 풍수도참 사상과 결부되어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산 사람이 사는 터를 양기(陽基)라 하고 죽은 사람의 집인 무덤을 음택(陰宅)이라 하여, 좋은 양기에서 살면 부귀 다자손하여 행복하고 좋은 음기에 조상을 모시면 조상의 음덕으로 자손이 발복(發福)한다는 것이 풍수지리적 사고이다. 조상의 시신은 비록 유명을 달리하였을지라도 자손과 연결된 기(氣)는 그대로 유지되어 살아 있는 자손에게 길흉화복의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조상의 시신이 명당에 묻히면 자손이 번창하고 흉지에 묻히면 온갖 재앙을 면하지 못한다는 것이 풍수지리사상이다. 그리하여 조상을 명당에 묻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고 그로 인하여 무덤 싸움이 벌어지는 일도 많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왕실이나 민간이나 풍수지리에 온통 휩쓸려 들어갔다. 그것은 자손의 발복이라는 이기적 동기가 조상에게 효도한다는 추효(追孝)로 위장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성행되어 갔다. 비록 불길한 천명을 타고 났을지라도 조상의 시신을 길지에 모심으로써 전화위복할 것을 바라는 것이다. 이는 어느 의미에서 천명을 거역하는 일이므로 함부로 할 수 없고 전문적 술사인 지관(地官, 地師)의 힘을 빌리게 된다. 길지의 선정은 산맥의 흐름을 보는 간료(看龍), 혈점을 향하여 산세가 수렴되는 것을 보는 득수, 관을 안치할 광을 정하는 재혈(栽穴), 방향의 길흉을 정하는 방위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한다.
이 풍수지리사상은 중국에서 비롯되어 삼국시대에 우리나라로 유입된 것으로, 특히 고려 건국에 간여한 도선(道詵)과 조선 태조의 왕사로서 한양에 도읍을 정한 무학(無學) 등 주로 승려에 의해서 전승되다가 조선조에 들어서는 수많은 명사가 배출되어 오늘날까지도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조선팔도 지도목판(朝鮮八道 地圖木板)

조선팔도 지도는 1402년(태종2년) 이회(李?)가 제작한 지도로 원본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 지도를 바탕으로 수정 보안된 지도가 조선시대 후기에 다양하게 전해지고 있다. 이른 시기의 지도들은 목판지도 보다 필사본으로 채색 되었으며 지리좌표까지 그려지고 있었으나 조선시대 후기에는 생략되고 간략하며 축소된 목판지도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지도의 제작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정조 초에 평안도의 초산(楚山)이 이산(理山)으로 지명이 바뀌고, 충청도의 노산(魯山)이 이산(尼山)으로 바뀐 지명이 나타나며 경상도의 안음(安陰)이 안의(安義)로 나타나고 산음(山蔭)이 산청(山淸)으로 기록되어 있어 조선시대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지도의 내용 형식은 대체로 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나는 것과 유사하며 산과 물, 군(郡), 현(縣), 진(津), 원(員), 역(驛), 성(城) 등이 나타나는 여행용이나 군사용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근래 한일간 논쟁거리로 대두되고 있는 강원도 지도에서 울릉도와 독도가 명확하게 조선 땅임을 나타내고 있고 경상도 지도에서는 대마도가 조선 땅의 섬처럼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각도와 경계나 한양까지의 거리, 역사적 내용, 거민(居民)의 호수까지 적고 있어 동국여지승람의 부분을 참고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천문(天文)과 지리(地理)에 뛰어난 관심과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사실을 오늘 우리는 고구려 고분벽화와 신라의 경주 첨성대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인들의 이러한 천문과 지리에 관한 관심과 지식은 많은 천문도와 지도, 천문서와 지리서 등을 그리고 저술하게 되었다.
특히 풍수지리사상의 발달과 유행은 많은 산형도(山形圖)와 지도를 제작하게 하였다. 이처럼 지도는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므로 옛날부터 관청이나 민간에서는 그 필요에 따라서 여러 가지 방법과 크기로 제작하였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지도의 제작은 지형과 지물 등을 그대로 모두 그릴 수 없었으므로 간략한 부호·기호·그림 등으로 나타냈다. 어떻든 한국인이 지도를 제작하기 시작한 역사는 1600년이 더 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 남아 있는 유물과 문헌에 의하면 고구려인은 무덤 안의 벽에 별자리그림(星宿圖)과 고을그림(城圖) 등을 그렸다. 즉 4세기에 만들어진 요동성총(遼東城塚)의 벽에 그려진 요동성도(遼東城圖) 등과 7세기에 그려진 봉역도(封域圖) 등이 좋은 예이다. 지도제작에 관한 한국인의 인식·지식·기술·전통 등은 이렇게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어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말기까지 계속 확대되고 발전하여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정확한 지도의 제작은 천문도의 제작기술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게 되는데 조선시대 초기, 즉 태조 4년(1395)에 완성된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地圖, 별의 수가 1,463개나 그려진 천문도)만 보아도 당시의 지도 제작 수준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태종2년(1402)에는 상당히 정확한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까지 제작할 수 있었다. 물론 동국지도·8도지도 등 조선지도도 제작하였음은 말할 나위 없다.
조선시대에는 지도의 용도와 대상에 따라서 아주 세밀한 세도(細圖)와 대강 그린 약도(略圖)가 제작되었는데 여지승람식(與地勝覽式) 지도가 주로 제작되었다. 이 때의 지도에는 알아보기 쉽도록 채색을 하거나 지리지(地理志)의 부도(附圖)라는 생각에서 설명을 덧붙이기도 하였다. 물로 조선시대의 지도는 산악평면도법(山岳平面圖法)·백리척(百里尺)·삼각측량법(三角測量法)·기리고차(記里鼓車) 등을 응용하여 과학적으로 제작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정치와 군사 등 여러 가지 필요에 의하여 다양한 종류의 지도가 제작되었기 때문에 서울에 있는 서운관(書雲觀, 오늘의 지리원·천문대·기상대 등을 합한 국립기관)과 도화서(圖畵署, 국립미술기관)에서 관장하였으며 , 군사기밀의 누설 방지를 위하여 국내와 국외로 알려지는 것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즉 민간인은 함부로 지도를 제작할 수도 없었고, 자세히 그린 지도 등은 가지고 있을 수도 없었다. 또 조선시대에는 한국·중국·일본·유구 등을 그린 천하도(세계지도)·8도도·동국지도 등 전국지도, 군현도와 한양도(漢陽圖) 등 지방지도 외에도 산천지도(山川圖)·군사도(軍事圖)·군문분계도(軍門分界圖)·수리도(水理圖)·교통도·인물도(지역출신 인물표기도) 등 특수지도가 제작되기도 하였다.
17세기 이후에는 서양 선교사들의 동양 진출로 중국을 통하여 우리나라에도 세계지도(페르비스트의 곤여전도 등)가 전래되어 지리사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기술을 가져와 지도제작을 더욱 활발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많은 지도 가운데 가장 탁월한 것은 고산자 김정호(?~1864?)기 1861년에 완성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보물850호, 절첩식 전 22첩, 한반도의 16만분의 1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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